제 719 호 [순간포착] 잠시 쉬어 가도 괜찮아
잠시 쉬어 가도 괜찮아 사진 속 장소는 성수동에 위치한 서울숲 가족마당의 한 곳이다. 촬영 중 우연히 시야에 들어온 비눗방울이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바람에 몸을 맡겨 휘날리는 비눗방울은 자유로운 영혼 같았으며 그에 몸을 맡겨 신나 하는 아이들 또한 눈동자 속 즐거움이 훤하였다. 성인과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 다시금 서울숲을 찾아가니 무척이나 감회가 새로웠다. 마치 내 자신이 동심으로 돌아가 비눗방울의 움직임에 발맞춰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느꼈다. 대학교라는 캠퍼스의 낭만만을 바라보고 학창시절부터 피땀 흘려가며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잠깐의 숨을 불어넣어 주는 달콤한 휴식 시간이었다. 더불어 사진 속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비눗방울 인지, 사람인지, 사진 밖의 무엇인지 모를 호기심을 자극하는 점도 있어 시각적 재미를 더하는 듯하다. 보통 학생의 시각에서 보자면 논다는 것은 신분에 맞지 않고 공부에 방해가 되며 소중한 시간을 버린다고 하여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 또한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무조건 노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점을 가볍게 여기기만 한다면 친구와 잠깐 만나 수다를 떠는 것부터 시작해 좋아하는 상대를 만나는 것까지 사치이며 결국 그 끝에서는 시간의 개념 자체를 사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게 된다.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 시간은 개개인의 열정과 애정이 담긴 것들이기에 존중받아 마땅하다. 때문에 여가 시간을 갖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것 또한 삶의 일부분이며 열차가 정류장을 하나씩 거쳐 가며 천천히 길을 밟아가듯이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앞과 뒤를 돌아보며 한 발씩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슴우들도 한 번씩은 잠시 쉬어 가기도 하고 취미나 여가 생활도 즐겨보며 자신에게 잘하고 있다며 보듬어 줄 수 있는 기량을 가진 학우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시원 기자
제 718 호 [기자석] 편견없는 시야
편견없는 시야 세상을 바라볼 때 좀 더 창의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선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편견이라는 말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 또는 생각'을 의미하며 비슷한 말로는 고정관념이 있다. 많고 많은 단어 중 굳이 편견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은 고정관념, 선입견 등은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인지의 영역이며, 차별은 직접 드러나는 행동이지만, 편견은 어떤 것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것을 볼 때조차 편견으로 바라볼까? 우리가 편견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보통 나쁘고, 논리적이지 못한 견해에 '편견이 있다'라고 한다. 우리는 왜 편견을 가질까? 단순히 경험에 의한 사고방식, 성격, 기타 등등 사람의 특성을 결정짓는 요소는 다양하며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편견에 대한 기원을 찾기 위해 많은 학자가 노력하는 등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임에도 그 양상은 너무 다양하다. 편견과 고정관념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쁠까? 창의적인 상상을 하는 데 고정관념의 역할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반전을 일으키려면 그만한 정해진 것이 확고할수록 효과가 커진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그 이상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고정관념 없이 세상을 볼 때 더 창의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사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편견을 사용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거나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하는 것처럼 더 많은 것을 경험해야한다. 물론 이러한 말은 질리도록 들었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이다. "편견을 줄이려면 내 세상을 넓히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인정하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인식을 넓혀간다는 것, 어떻게 보면 이게 교육의 본질이 아닐까요?" 김수정(2012) [나는 런던에서 사람책을 읽는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보고자 대상을 분석하고 그 결과 중 가장 익숙한 것을 본인이 아는 것에 비교하거나 비유하듯이 살펴본다. 또 너무 많은 대상이 있어도 그 속에서 비슷한 것을 묶어내 공통적인 특성으로 생각하고, 너무 많은 특징이 있어도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그대로 기억 속에 저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그 기억을 끄집어낼 땐 아마 공통적이거나, 가장 강렬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수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단일한 사건을 '유형화'하고, 친숙한 범주 속에 넣은 후 그에 따라 행동한다." 고든 올포트 [편견]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MBTI도 일반화와 편견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본인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태도나 습관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남이 재단한 특성에 따라 본인의 모습을 맞춘다. 어떤 MBTI 유형은 선호하거나 선호하지 않는다. '취미는 취미일 뿐'이라고 말해도 사실 이미 스스로 조금씩 만들어낸 프레임에 남들을 맞추거나 본인이 맞추어간다. MBTI의 문제만이 아니라 직업 인식, 학벌, 취미나 성향까지 어떤 것이든 편견과 일반화는 같이 움직인다. 편견은 인식하기 어렵다. 편견에 대해 말하면서도 편견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미 우리는 유튜브,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 트위터 등 SNS로 집단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공동체가 너무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하게 말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편협함에 대해 인지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듯이 스스로의 생각을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미디어 매체가 지속적으로 정보를 주입하기 때문에 매 순간에도 이것이 온전한 본인의 생각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왜 본인의 생각이 그렇게 중요하냐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한 사람, 개인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생각하는 연습을 통해 본인 스스로 일련의 과정이나 사고회로를 만들어낸다면 어떠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본인 스스로 그 답을 찾아낼 수 있다. 컴퓨팅 사고방식도 아마 이러한 맥락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도 결국 하나의 수단이라 끊임없이 연습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김다엘 기자
제 718 호 이상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상한 사람들"
▲최인호 / 열림원 / 2006 (출처: yes 24)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로 첫 문장을 시작하며 3명의 이상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 이야기에선 집을 얻기 위해 평생을 구걸하며 살아온 사람이 결국 집을 잃고 남은 화자가 그 사람을 회상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시대는 동냥이 있고 굴뚝이 존재하는 오래전에서부터 시작하며 재개발의 바람이 부는 현대로까지 이어진다. 그의 부모도 이상하고 본인도 이상하나 이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을 땐 모든 것이 이상했다. 사람은 죽어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작은 집을 얻게 된다는데, 그렇다면 첫번째 주인공이 집을 위해 본인의 인생을 내다 버린 것은 이상한 것인가? 어릴 땐 세상이 자기 집이라 생각하며 나무 위에서 자는 것이 좋았으나 아버지마저 죽은 후엔 집을 얻기 위해 사활을 건다. 나는 여기서 사회적인 복지와 노숙인에 대한 인식의 문제보다도 가장 와닿았던 것은 평생 집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이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이 지금 집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청년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상한 이야기 ‘포플러나무’는 어릴 때 높이 뛰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식과 아내를 잃고 무기력해지며 결국 어떤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모두 그를 보고 이상하다고 하였는데 화자가 늙어버린 그에게 높이 뛰기를 계속 권유하였고 그는 높이 뛰다 다리가 부러져버렸다. 그 이후 포플러나무를 심는다. 화자가 이유에 대해 묻고, 늙은 할아버지는 언젠가 계속 높이 뛰기를 연습하면 다시 잘 뛸 수 있을 것이란 말을 하며 무릎보다도 작은 포플러나무 위를 뛰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화자가 다 자라 청년이 되어서 다시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할아버지는 굽은 등과 다 빠진 이만 남은 상태였음에도 단번에 높이 자란 나무 위로 뛰어올라 신발만 남기고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초반의 주인공은 우울하고 지친 사람이었다면 이후의 주인공은 목표만을 바라보며 꾸준히 성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리가 부러진 사건 이후로 본인의 직접적인 상태를 마주하고 나니 그제야 발전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만약 본인이 막혀있거나 슬럼프가 온 것 같다면 실패나 직접적인 자기 상태 점검을 하여 본인을 돌아보고 작은 목표를 세워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이야기 ‘침묵은 금이다’는 안정적인 직장, 단란한 가정의 아버지인 주인공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어느 순간 갑자기 말이 싫어졌다며 온종일 침묵을 유지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처음엔 다들 단순한 도전이나 변덕으로 생각했지만, 기간이 점점 늘어날수록 가족들과도 멀어지고 회사에서도 해고당하며 인생이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으로 변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다시 말을 하려고 했지만 1년이나 넘게 말을 하지 않은 나머지 정말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부분이다. 주인공은 말뿐인 대화는 진심 어린 대화가 아니라 생각해 침묵을 유지했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으론, 말을 잘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허례허식이라도 단순한 인사치레가 모르는 체하는 침묵보다 낫다는 것이다. 말은 신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선 작가의 말을 보면 바다거북이 알을 낳기 위해 다시 바다로 돌아오고, 알에서 깨어난 아기 거북은 바다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여기서 거북이는 집이 있는 존재이며(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 알을 낳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것은 본인의 말하는 능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침묵은 금이다) 바다를 향해 도전하는 아기 거북은 역경이 있어도 결국 뛰어넘어 목표에 도달하는 할아버지(포플러나무)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2006년 작품이 지금 나오는 책들과 문장이 지금의 베스트셀러의 문장과 미묘하게 달랐지만 오히려 반가웠다. 세련된 문장도 좋지만, 옛 작가들만의 따뜻하고 투박한 듯 부드러운 문장은 어릴 적 읽었던 교과서의 느낌이 났다. 단편 3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 시간 날 때 가볍게 읽기에 매우 좋다. 마음의 양식을 주고 사라지는 느낌을 받아 소개하였다. 김다엘 기자
제 718 호 [만평] 다함께 동행
[만평] 다함께 동행_김다엘 기자
제 718 호 [영화로 세상보기]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
[영화로 세상보기]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 / 2022 18세기 프랑스, 요리의 역사를 바꾼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 이야기! 영화 제목인 Delicious는 <매우 맛있는, 매우 향긋한, (감각적으로) 매우 기분 좋은>이란 사전적인 의미를 갖는다. 영화 속에서는 'Delicious'가 주인공이 개발한 감자를 베이스로 한 디저트 이름이기도 한데, 이 디저트를 맛본 하녀가 감탄으로 내뱉은 '딜리셔스'가 이 음식의 이름이 되어버렸고, 후반부에서는 주인공이 차린 식당의 이름이 된다. 혁명 바로 직전 1789년의 프랑스에서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요리하던 셰프 망스롱, 그가 모시던 샹포르 공작의 식탁 위에 새롭게 개발한 메뉴를 선보이자 바로 해고된다. 그 이후 요리에 대한 열정을 완전히 내려놓고 평범한 주막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중,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루이즈'라는 한 여성이 찾아온다. 영화의 배경인 18세기에는 귀족의 특권이 엄청났던 시기이다. 그래서 요리사의 음식을 먹고 음미하는 것 자체가 서민들은 누릴 수 없는 귀족의 특권이었다. 그렇게 귀족의 어깨는 잔뜩 솟아있었고 셰프마저 기량을 펼칠 수 없는 시대였다. 현대에는 레스토랑에 간다면 메뉴에 있는 음식 중 하나를 골라 먹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주 예전에는 귀족이 원하는 음식을 셰프가 요리해야 하는 문화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딜리셔스’라는 제목부터 왠지 맛있는 음식이 잔뜩 등장할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그렇진 않다. 영화는 귀족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전문 요리사의 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그 첫 시도의 레스토랑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포커스를 더욱 맞추었다. 레스토랑을 운영하기까지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어렵사리 열게 된 레스토랑은 망스롱의 훌륭한 요리 솜씨 덕분에 입소문까지 타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는다. 투박한 장소에서 하나씩 정리되며 아름다운 가게를 이루는 그 모습이, 그리고 보기만 해도 유기농 티가 팍팍 나는 요리들이 영화를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또한,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서민들과 귀족들 사이에 고조된 감정과 긴장감도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다. 18세기 인물들의 복식을 비롯해 식기류, 정원, 자연경관과 같은 프랑스의 시골 풍경과 음식 등의 볼거리가 매우 풍부해서 좋은 영화이다. 음식과 관련된 질투와 권력으로 인한 복수도 볼 수 있는 등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 마지막에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었다는 내용을 보여주면서 귀족들의 풍자가 더욱 희화화되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 혁명전의 프랑스 귀족 문화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귀족 문화를 소개하면서도 적당히 그들의 세계를 꼬집고 희화화하고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요리 과정과 비주얼을 보며 어떻게 프렌치 레스토랑이 시작되었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주어 볼거리가 풍부한 힐링 영화를 보고 싶다면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정소영 기자
제 718 호 유한한 영원
사람은 평생 삶을 영유하지 못한다. 진시황이 평생을 찾아 헤맨 불로초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이 인간의 영원한 삶을 가능케 하는 것도 없으며, 인간 본연의 성질 또한 영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거나, 사랑하는 사람 또는 친한 친구와의 이별을 겪다 보면 자신이 홀로 살아가는 것 같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살아가는 이유를 잊어버리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특히나 정의 전부를 다 내어주고 진심으로 대한 이와의 이별은 절대 잊지 못할 상처와 슬픔으로 남을 것이고 이 이별만큼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점이 있다. 사람은 평생을 살아가지 못하므로 내 곁에 평생을 머물러 있지도 못하는 것이며 유한한 생명을 가졌기에 온 진심으로 사랑하더라도 언제든 떠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막연히 속상해하고 슬픔에 빠진 나날을 보내지만 말고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 만큼, 믿어준 만큼, 소중했던 만큼 그에 대한 인연으로 말끔히 보내주는 게 예의이며 자신한테도 더 이상의 상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잊을 수 있기에 보내주는 것이므로 그리움의 시간 속에서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는 것은 어떨까? 양시원 기자
제 717 호 [교수사설] 챗봇 시대, 우리의 소통력 문제
챗봇 시대, 우리의 소통력 문제 챗봇은 인간이 만들어 낸 수많은 정보를 검색하여 질문에 답하는 대화형 인공지능의 하나이다. 규칙에 맞게 질문을 하면 썩 나쁘지 않은 정보를 꽤 괜찮은 문장으로 대답을 한다. 웬만한 보고서 하나는 거뜬히 써내는 기능도 갖추고 있다. 정보화 시대의 발전으로 얻은 성과물이 이 정도라고 하니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육자는 무슨 일을 하고, 또 학생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굳이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 않아도 챗봇이 척척 답을 내놓은 세상에서 교육자와 학생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처한 사정이 이러하니 “대학에서 굳이 사고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사회에 잘 적응하며 맡은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 그 구체적인 항목 중에 가장 먼저 원활한 의사소통력을 손꼽는다. 원활한 의사소통력이란 무엇일까? 챗지피티(ChatGPT)에게 물었다. “소통력이 뭐예요?” 챗지피티는 이렇게 답했다. “소통력은 다른 사람들과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상대방의 생각, 느낌, 의견을 듣고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설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통력은 일상적인 대화, 직장에서의 업무, 가족 관계,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상대방과의 원활한 대화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소통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물었다. “소통력을 기르는 방법이 뭐예요?” 챗지피티는 이 질문에 대해 주요한 방법이라며 여섯 가지 항목을 언급하였다. 항목과 설명까지 타당한 답을 내놓았는데, 항목만 정리하면 이렇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명확하게 표현하기,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대화하기, 듣기 연습하기, 비판적 사고 기르기, 갈등 해결 방법 익히기.”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질문을 하면서 ‘인공지능 활용하기’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챗지피티가 답한 소통력을 기르는 방법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과 무관한 것들이었다. ‘명확하게 표현하기’ 항목을 위해 기존에 공개된 정보를 챗봇을 통해 활용할 수 있을 뿐, 나머지 항목은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이번에는 “소통력 향상에 인공지능이 어떤 도움을 줄까요?”라고 물었더니 자연어 처리 기술을 이용한 챗봇을 이용하여 답변을 제공받는 것, 음성 인식 기술을 이용하는 것, 자동 번역 기술을 이용하는 것, 감정 분석 기술을 이용하는 것 등의 답을 내놓았다. 이 모두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종류에 대한 것이고, 소통력 향상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인식하여 내놓은 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시 글쓰기 교육의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우리가 글쓰기를 할 때 하는 일은 주제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 내용을 숙지하고 그 내용을 잘 정리하여 나의 논리를 세우고 더 나아가 새로운 생각을 더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주제와 관련된 기존의 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확인하고자 할 때 챗봇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과정은 본인 스스로 해야 한다. 그래서 ‘보고서를 써주는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과학의 이기를 잘 활용해도 되니, 이제 보고서 작성이나 글쓰기를 그다지 안 배워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오해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회가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회사에서 의사소통력이 뛰어난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통력은 면접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얼른 챗봇에게 물어보고 답을 할 참도 주지 않고,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 ‘잠시만요.’ 하면서 상대를 기다리게 할 참도 주지 않는다. 결국 아무리 활용하기 좋은 인공지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고 내가 부딪쳐야 한다. 혹시라도 보고서 작성법과 글쓰기 교육이 필요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 교육에서 ‘사고와 표현’이라는 의사소통력 관련 교과목을 이수하는 것은 그 배움의 과정에서 우리의 사고가 자라고 소통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며 글을 쓰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고를 넓히고, 글을 다듬는 과정에서 더욱 섬세한 분별력을 기르며,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사고력이 길러진다. 그러한 수많은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나의 소통력은 완성되는 것이다.
제 717 호 [영화로 세상 보기] 어느새 한 몸처럼, 현대인의 스마트폰 과의존을 돌아보며.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영화로 세상 보기] 어느새 한 몸처럼, 현대인의 스마트폰 과의존을 돌아보며.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 2023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항상 스마트폰을 지니고 다니기 시작했다. 단순히 친구와 수다를 떨 때에도, 아니면 민감한 금융 문제를 다룰 때에도 이제는 전자기기가 없으면 오히려 불편한 수준이 됐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이러한 생활 양식을 가진 현대인에게 ‘스마트폰 과의존의 위험성’이라는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회사원 ‘나미’는 퇴근 중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스마트폰을 잃어버린다. 이 스마트폰을 주운 ‘준영’은 나미의 스마트폰에 스파이웨어를 설치하고 스마트폰에 남아 있는 나미의 신상정보를 모두 캐낸 뒤 그녀를 살인할 목적으로 나미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준영은 먼저 나미의 주변 인물들을 그녀의 곁에서 하나둘씩 제거하며 나미가 삶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든다. 그의 내막을 알게 된 나미는 형사 지만과 협력하여 준영을 검거하는 데 성공하고, 그녀는 다시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스릴러 작품으로, 일본 평단의 찬사를 받았던 시가 아키라의 추리소설 <スマホを落としただけなのに>를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단편영화 <착한, 사람들>로 영화계에 얼굴을 비춘 김태준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2023년 2월 17일 영화가 공개된 이후 대한민국을 포함해 총 18개국에서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를 기록하면서 세계적인 호응을 받았다. 스마트폰이 우리의 삶과 밀접함을 가지는 만큼, 사용에 경각심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준영과 같은 인물에게 본인의 분신인 핸드폰을 빼앗기게 된다면, 영화에서 연출한 것처럼 일상이 파국으로 치닫는 데에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결국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누구든 나미로 지목될 수 있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아예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우리는 현명한 스마트폰 이용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Don‘t put all your eggs in one basket)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일상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스마트폰을 이젠 잠시 꺼두고, 오프라인에서의 생활에서 새로운 활기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을 감상하며 직접 느껴보자. 김상범 기자
제 717 호 [만평] 따뜻한 봄
[만평] 따뜻한 봄_김다엘 기자
제 717 호 따스함 속 나의 계절은?
제법 쌀쌀했던 3월의 추위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따뜻한 기온이 올라오는 4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추위가 꺾이고 따스함이 찾아오면 형형색색의 활기가 돋보이기 마련이다. 시들어 있던 나무와 꽂잎들이 다시 피어나고 학교는 새학기의 개강을 맞이해 신입생과 복학생 밎 재학생들로 다시금 북적이며 활기를 되찾아가는 모습이 유독 눈에 띈다. 그러나 이러한 활기 속 이면에는 예상치 못한 고난이 숨어있다. 철창에만 갇혀 지내던 새가 그 공간에서 풀려나게 되면 자유를 만끽하기에 앞서 높은 건물과 밤이 되면 켜지는 불빛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기에 제 비행 실력을 뽐내기 어렵다. 우리 슴우들도 이와 마찬가지 일거라 생각이 든다. 대학 입학 초반에는 익숙하던 고등학교 시절과 본 고향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뿐더러 완전히 새로운 사람관계를 맺어가는 어색함이라는 공간 속에서 지내는 것 또한 힘에 부칠 것이다. 캠퍼스의 낭만에 푹 젖어 들어 들뜨면서도 한편으로는 학교생활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한 수많은 고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학기 초를 보내고 있는 학우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현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새하얀 의자에 홀로 걸터앉은 외로운 새 한마리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로움 속에서 하염없이 어느 방향의 길로 가야 할지 헤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나 자신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주변에 누가 있는지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쉽게 보이는 것도 놓칠 수 있으니 여유를 갖고 따스함에 몸을 맡겨 나만의 계절을 서서히 음미해본다면 점차 적응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상명 학우 여러분들도 내 계절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각자의 계절은 어떤지 서로 얘기하며 진정한 우정을 쌓는 것, 이렇게 쌓아가는 과정에서 멋진 인연을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 믿음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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