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8 호 [기자석] 잘했는지 모르겠네
[기자석] 잘했는지 모르겠네 학보사에 들어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그중에서도 편집장으로 활동한 지난 한 학기는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학보사에서 활동할 적이면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가지고 자라온 “기자”라는 꿈이 정말로 실현되는 듯한 환상을 꿈꾸게 했다. 하지만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을 넘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학교의 목소리’라는 역할에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대학 생활의 절반을 학보사와 함께 보냈음에도 아직 글에서조차 묻어나는 부족한 점들은 나를 옭아매는 족쇄 같다. 내가 편집장을 맡게 된 것은 정말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현재 모든 대학 언론이 인력난을 겪고 있듯이 우리 학보사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고, 그저 열정과 욕망으로 뭉친 나는 자만심을 근거로 번쩍 손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편집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우리 학보사의 방향성을 고민하게 된 것도 이때쯤이다. 미디어콘텐츠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대학 신문의 대상 독자인 20~30대 연령층의 학생들에게는 엄숙한 주제에 딱딱한 문체를 담는 기사의 형식으로 큰 반응을 불러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타 학보사에서는 뉴미디어부를 창설하거나 학보사만의 독자적인 캐릭터를 공모하는 등의 선택 효과를 노리고는 한다. 하지만 국방의 의무를 앞두고 있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그렇게 변혁으로부터 도망치게 되었다. 대신 나는 나만의 대학 언론의 불씨를 살릴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신문은 막론하고, 우리가 글을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나의 불씨는 그곳에서 시작했다. 나는 학생들이 글을 읽으려면 먼저 재미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능의 선택과목을 고르듯이, 입시 때의 전공을 고르듯이. 각자만의 흥미에서 특정한 행동이 비롯된다. 매일 뉴스를 읽고 청년들의 호응을 이끌 만한 주제를 정리하고, 학생 기자들의 기사 아이템을 검토했다. 그 끝에는 즉석식품 같은 기사가 탄생하기 마련이었다. 몇 개의 기사를 검수할 때면 웃음이 났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글에서 묻어났다. 그리고 그 행복이 독자들에게도 닿았기를 기도한다. 그렇다고 기사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을 지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대학은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그 구성원들끼리의 건전한 토론의 장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바이다. 대학 언론은 그 사이에서 정보를 조달하며 상호 간 커뮤니케이션에 이바지하는 것이 하나의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분별한 언쟁은 오히려 건설적인 담론을 방해하는 요소이기에, 학생과 교내구성원의 갈등을 중재하여 둘 사이의 간극을 줄이고자 노력하는 것이 또 다른 언론의 역할이다. 결국 재미와 진중함,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이 지난 한 학기 동안 상명대학교 학보사의 숙제였다. 앞으로의 학보사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감히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고 대학도 그것에 반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도 틀림없는 말이다. 학보사가 밟아야 할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앞으로의 소회에도 많은 관심을 주길 바라며 기쁜 마음으로 나의 기자 생활을 마감한다. 김상범 편집장
제 727 호 [만평] 기대하는 크리스마스
[만평] 기대하는 크리스마스 김다엘 기자
제 727 호 [기자석] 무의식의 흐름
[기자석] 무의식의 흐름 곽민진 기자 날씨가 부쩍 추워진 요즘 같은 날에는 괜히 글자 하나를 끄적이다 지우고 다시 펜을 허공에 배회하기를 반복하는 감상에 빠지곤 한다. 바깥에 매서운 바람이 흩날릴 때, 건조하지만 후끈한 히터 공기로 덥혀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가을의 어여쁜 낙엽이 하나씩 사그라들 때쯤, 서서히 날씨가 매서워지기 시작한다. 동물들이 겨울잠에 들 준비를 하듯, 우리들 역시 서서히 일 년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학기의 마지막은 언제나 그렇듯 쉽지 않다. 그것이 굳이 시험과 과제들이 몰아닥쳐 들어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연말, 한 해의 마무리, 한 학기의 마무리, 무언가의 종말을 뜻하는 시점은 언제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어렸을 적 그 언젠가, 이젠 희미할 정도의 까마득한 어느 낙천적인 이는 새로운 한 해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진 못할 것이다. 그때는 한 해를 넘기는 게 인생의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듯, 설렜었나. 그때는 한 살을 더 먹어가는 자신이 다 큰 것 같고, 그것이 자랑스러웠었나. 웃기는 일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동일하게 시간은 흘러가는데 왜 그때는 어른이 되는 것을 뭐 그리 바랐는지. 그때의 내가 ‘어른’으로 정의할 즈음의 나이가 되어서 회상하는 어느 날. 어른들이 하시는 고루한 말씀들에 공감할 즈음, 문득 내가 나도 모를 어딘가를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지점은 너무나 아득하고 희미해서 이젠 내가 그리워하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그때의 당신이 그리운 건지. 그때의 내가 그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에겐 너무나도 완벽하게 아스라하다. 과거는 미화된다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내 망각의 안배일까.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이라는 망각의 어느 희미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축복마저도 걷어가지 못한 잔해들을 애써 부여잡는다. 그 잔해들을 가득 끌어모은 채 초라하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당신의 미지근한 손의 온도와 나를 잔잔히 이끌던 눈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인생의 첫 종말이자, 유년 시절의 종지부를 찍어낸 당신께 나는 여전히 하루의 독백을 뱉어낸다. 20대의 어느 초입에서,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청춘이라고 일컫는 하루가 어깨를 짓누를 때 나는 여전히 중얼거린다. 누군가는 하루하루를 나아가라며 격려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저 버텨내기에, 제자리걸음의 치열함을 공감한다. 하루의 무게를 모르던 어느 날의 내가 바라던 어른이 되기는 한참 멀었다. 그때의 나에게 반짝거리던 그 여유로움은 몇 겹의 시간을 둘러싸 포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는 수많은 독백에 답하면서 간혹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이다. 곽민진 기자
제 727 호 [순간포착] 촛불 속 우리의 시간
[순간포착] 촛불 속 우리의 시간 어느덧 2023년의 해도 거의 저물어가고 날씨도 제법 겨울 날씨가 되어 패딩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만연해졌다. 이렇게 보면 겨울이 왔다는 것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유난히도 더웠던 올 여름을 뒤로 하고 이제는 한 해의 마무리를 하며 그동안의 일을 정리하고 다음 해의 준비를 할 시기이다. 열심히 준비했던 과정 속에서 예상대로 흘러가 좋은 성과를 내면 좋겠지만 그러하지 않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고작 20대의 세월에 불과하며 앞으로의 남은 시간이 훨씬 더 많기에 남은 여생 동안 이룰 수 있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노력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올해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나 자신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두터운 우정을 지닌 친구, 사랑하는 연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 우리는 곁에 있는 이들을 당연한 존재로 여기고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거나 사랑한다는 표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내 곁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한 명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은 그 사람 자체로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이번 연말에는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추운 겨울날에도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따뜻함을 선사해주는 그에게 ‘사랑한다’ 한마디를 건네 보는 학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올해를 끝으로 양쪽 어깨로도 부족했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하염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학우들에게 칭찬의 박수를 보내며 그동안 달려왔던 길이 험난했던 것을 알기에 성과의 유무를 떠나 그저 잘했다며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다. 양시원 기자
제 727 호 [교수사설]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위해
[교수사설]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위해 의학사의 거장인 앤드류 스컬의 저서 ‘광기와 문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신건강은 성서에 기록될 정도로 인류사에서 긴 시간 다뤄졌었다. 그렇지만 1900년도 중엽까지도 정신건강에 대처하는 방식은 ‘언덕 위의 하얀집’이라는 표현과 같이 도시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철저하게 환자를 고립하게 만드는 형태였다. 그리고 정신건강에 취약한 이들의 인권유린은 빈번했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그들이 다시 복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2차세계대전 이후 전복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신경증(shell shock)을 앓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전통적 가치관에 노골적으로 저항감을 드러낸 여성, 외국인, 사회적 약자 등을 모두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간주해 정신질환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배제와 격리가 더 이상 어려워지고, 영국의 정신의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기충격, 전두엽절제술, 신약투여 등과 같은 인습에 저항하는 ‘반정신의학운동’이 확산하면서 제3의 방식으로 정신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 시도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로널드 데이비드 랭은 ‘난리법석공간(rumpus space)’이라고 불리는 실험적 치료 환경을 제공했다. 여기에서는 환자와 의료진의 경계가 없었으며, 민주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자유로우면서도 평등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공간은 조현병 환자에게 특히 효율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 최선의 치료법은 진정한 존중과 소통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용된 이들은 후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했으며, 난리법석공간의 존속을 위해 경제활동에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현상은 실험적으로 약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지했던 이 공간이 사라진 후, 그간 수용되었던 대다수가 다시 정신적 문제를 일으켜 이곳에 다시 돌아오길 희망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난리법석공간의 지리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긍정적인 정동(情動)적 만남’일 것이다. 사실 정동은 낯선 표현인데, 희로애락과 같이 일시적이면서도 급격히 일어나는 심리적 상태를 뜻한다. 단지, 정동은 느낌, 정서, 감정 등과 같이 개인의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마음, 있는 그대로 수용, 진정한 허락 등은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일정한 잣대에 따른 평가, 엄격함, 편견과 거부 등은 부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정동은 심리적이며, 정서적인 특징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체화(somatization)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에서 부정적인 정동적 만남은 알 수 없는 신체적 고통(예: 신경계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현재 우리들은 삶은 어떨까. 안타깝지만 부정적인 정동적 만남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전하는 세상 소식만 봐도 그렇다. 경쟁적 관계, 경제위기에 따른 긴장, 적응하기 어려운 변화 등의 사회적 분위기는 깊은 곳에 숨어있는 불안과 긴장을 자극한다. 이뿐일까. 일상생활에서, 특히 매일의 삶이 펼쳐지는 캠퍼스 곳곳에서 느껴지는 무관심, 차가운 시선, 예의 없는 언행, 내로남불식의 이기심 등은 마음을 닫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무방비 상태로 살아가야만 할까? 랭의 난리법석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생활을 치유의 장(場)으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 굳이 종교적 교훈인 불교의 무재칠시(無財七施)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따뜻한 미소, 반가운 인사, 다정한 말씨, 타인에 대한 이해와 동정 등은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만들 수 있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산이다. 사실 타인을 대하는 모습은 나 자신을 향한 태도이다. 타인을 향한 친절함은 높은 자존감을, 불손함은 낮은 자존감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또한 타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뇌의 편도체에 영향을 끼쳐 공포 혹은 불안정 등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더 나아가 이러한 현상은 내가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미 뇌과학에서 밝힌 진실이며, 결국 우리는 일종의 거울효과 속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장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긍정적인 동정적 만남은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2024년은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해보길 제안하고 싶다. 한층 더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보듬는 환경에서 나와 남이 경계가 없음을 알아가는 과정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결국 모두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아닐지 싶다. 공간환경학부 박수경 교수
제 726 호 [순간포착] 빛나는 인생이 되기를
[순간포착] 빛나는 인생이 되기를 우리의 인생에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언제나 성공과 행복만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꽃길만 걷자”라는 문구를 이용해 그 사람의 인생과 길을 응원한다. 실은 이 또한 응원과 축복의 메시지에 불과하며 항상 꽃길만을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매사에 신중한 판단을 내리고 두 번, 세 번 곱씹어보며 정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것이다. 유성은 빛을 내면서 떨어지는 천체를 말한다. 우리 눈에는 항상 떨어지는 모습만 보인다. 그렇기에 추락, 몰락, 패배 등의 좋지 않은 이미지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성은 떨어지는 모습만이 전부가 아닌 밝게 빛을 내며 먼 곳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면도 있다. 또한 지표면까지 타지 않고 도달하면 운석이 되어 문화재로 전시가 되거나 가공하여 값비싼 보석만큼의 가치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유성은 표면적으로 우리에게 떨어지는 모습만을 보이지만 그 과정을 보자면, 우주를 맴돌던 밝게 빛나던 천체가 지구 사이를 지나치면서 그 궤적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빛줄기로 우리의 눈에 잠시 모습을 비추다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밝게 빛나는 시작이 있었기에 떨어지는 모습도 아름다운 광경을 선사하며 시작과 끝으로 가는 과정 전부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떨어지고 넘어지고 지칠 수도 있는 과정 속에서 담담히 일어나는 법을 배우며 그 떨어지는 모습조차도 아름다운 광경으로 만들어내는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비록 그 시작이 유성처럼 밝진 않더라도 지나치는 모습과 숨을 다하는 순간까지의 과정은 충분히 아름다운 빛줄기로 남을 수 있다. 지금의 나와 먼 미래의 나까지 모두 유성처럼 밝게 빛나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학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시원 기자
제 726 호 [만평] 집중!
[만평] 집중! 김다엘 기자
제 726 호 [영화로 세상보기] 뮤지컬 영화가 주는 여운,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로 세상보기] 뮤지컬 영화가 주는 여운, <인생은 아름다워> ▲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2022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류승룡, 염정아 주연의 한국 뮤지컬 영화이다. 2022년 9월 28일 개봉하여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이 연상되는 가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평생을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엄마 세연이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는 가슴 아픈 이야기로 영화는 시작한다. 잘 챙겨주고 싶은 세연의 속마음은 아무도 몰라주고 무뚝뚝한 남편 진봉은 모든 짜증을 세연에게 내고, 고3 아들과 중학생 딸은 엄마에게 투정과 짜증을 부린다. 현대 사회에 너무나도 익숙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활을 벗어나 떠나고 싶은 세연은 남은 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살면서 하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이루고자 한다. 세연의 가장 이루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는 첫사랑을 다시 찾는 것인데, 아내가 시한부라는 것을 알게 된 진봉은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첫사랑을 함께 찾으러 간다. 전반적인 내용은 세연의 첫사랑을 찾는 것이지만, 그 사이에서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 남편 진봉과 아내 세연이 사랑한 옛날 모습도 보여주며 관객들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또한 한국인의 감성을 저격한 옛 음악과 아름다운 장면의 조화는 영화를 더욱 몰입해 볼 수 있게 한다. ‘인생은 아름다워’에 등장하는 음악으로는 김광진의 편지,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등 익숙한 노래여서 가사를 더욱 곱씹어 보게 하고, 영화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 노래를 따로 듣게 되어도 영화 속 한 장면이 연상되곤 한다. 특히나 요즘 같은 가을, 겨울 계절에 이 영화의 OST인 하현상의 ‘Deep In Your Eyes’를 들으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특히나 우리와 나이대가 비슷한 자식의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경우, 가족의 시한부 판정을 알게 된 후 느끼는 감정과 느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뮤지컬 영화라 대사 중 갑작스레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이 나와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뮤지컬 영화라서 주는 여운과 감동이 있기에 다가오는 연말에 꼭 한 번 보기를 추천한다. 그저 슬픈 영화가 아니라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고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 삶과 죽음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모든 순간의 소중함 등 여러 교훈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정달희 기자
제 726 호 [뮤지컬로 세상보기] 한 여성 예술가의 삶을 담다, <프리다>
[뮤지컬로 세상보기] 한 여성 예술가의 삶을 담다, <프리다> ▲ 뮤지컬 <프리다> 올해 8월부터 10월 15일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국내 뮤지컬 제작사인 ‘EMK’의 네 번째 창작 뮤지컬인 <프리다>가 다시 한번 막을 올렸다. 뮤지컬 <프리다>는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여성 화가인 ‘프리다 칼로’의 생을 녹여낸 작품으로, 일반적인 뮤지컬의 형식과는 다르게 ‘last night show’라는 테마를 갖고 토크 쇼의 리허설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극이 전개된다. 쇼 자체가 그녀의 인생이고, 리허설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오케스트라가 아닌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배우는 오직 여배우 4명이 한 무대에 오른다는 것 역시 다른 뮤지컬들과 차별화된 특징이다. 작년에 본 극이 초연으로 막을 올렸을 당시엔 큰 관심을 얻지 못했으나, 점차 회차가 거듭되고 입소문을 타가며 마지막 공연에 가까워질수록 회전문 관객(한 극을 여러 차례 보는 관객)들도 늘어나고 성황리에 막을 내렸던 만큼 올해 1년 만에 돌아온다는 소식에 많은 뮤지컬 팬이 기뻐했다. 극의 주인공인 ‘프리다’ 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은 각각 ‘레플레하’, ‘데스티노’, ‘메모리아’이다. 우선 ‘레플레하’는 프리다와 함께 토크 쇼를 진행해 주는 인물로, 토크 쇼 중 프리다의 인생을 나타내는 데 있어선 프리다의 남편인 ‘디에고’의 역할도 같이 소화하는 감초 같은 역할이다. ‘데스티노’는 이름부터 운명이라는 영어단어인 데스티니와 비슷하듯, 프리다에게 여러 운명과 선택의 기회를 던져준다. 삶이 괴로운 그녀에게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지 않겠냐며 죽음을 제안하고 가혹하리만치 뼈아픈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메모리아'는 고통으로 가득했던 프리다의 삶에 희망을 준, 그녀가 본 ‘평행우주의 완벽한 또 다른 프리다'의 역할이다. 그녀가 좌절하거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설 때면 나타나 프리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메모리아의 역할이다. 2022년에는 ‘프리다’ 역에 최정원, 김소향 배우님이, ‘레플레하' 역에 전수미, 리사 배우님이, ‘데스티노’ 역에 정영아, 임정희 배우님이, ‘메모리아' 역에 최서연, 허혜진, 황우림 배우님이 캐스팅되어 멋진 무대를 선보였다. 올해는 작년에 함께한 김소향, 전수미, 리사, 정영아, 임정희, 최서연, 허혜진, 황우림 배우님뿐만 아니라 ‘프리다' 역에 알리, 김히어라 배우님, ‘레플레하'와 ‘데스티노', ‘메모리아' 역에 각각 스테파니, 이아름솔, 박시인 배우님이 합류하여 더 알차고 색다른 분위기의 무대를 즐길 수 있었다. ▲ 2023 뮤지컬 ‘프리다’ 캐스팅 (출처: EMK 뮤지컬컴퍼니) 프리다의 생애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고통'이 아닐까? 프리다의 삶에는 세 번의 큰 고통이 있었다. 첫 번째 고통은 6세라는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를 앓아 일찍이 다리의 성장이 멈춘 것이다. 또래 친구들이 곧 세상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어린 시절, 모두가 그녀를 ‘나무다리'라며 멀리했다. 프리다는 유난히 짧은 다리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 긴 부츠를 신기도 해보았지만, 사계절 내내 날씨가 후덥지근한 멕시코에서는 되레 이상해보일 뿐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10대는 찾아왔고, 첫사랑도 생겼다. 그 당시의 여자아이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거나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프리다는 사진가셨던 아버지의 열린 사고방식으로 해볼 수 있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대학에 진학해 만난 첫사랑인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와 함께 미래를 꿈꾸던 어느 날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아리아스와 함께 귀가하던 도중, 타고 있던 버스에 큰 사고가 난 것이 그녀의 두 번째 큰 고통이다.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고 피범벅이 돼 의사조차도 장담할 수 없던 대수술이었음에도 그녀는 무언가 세상에 남아 큰 할 일이라도 남은 듯 목숨을 부지했다. 수술을 마치고 그녀가 자의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오른손’ 뿐이었다. 프리다의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던 그녀에게 천장에 거울을 달아주었고,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려보라며 제안해 주셨다. 아버지를 따라 종종 사진에 색을 입히는 작업만 해오던 그녀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큰 위기가 찾아왔음에도 그녀는 사고 후유증으로 차게 된 코르셋과 지게 된 목발을, 갑옷과 검처럼 살겠다며 당당하고 굳세게 ‘코르셋’이라는 넘버(뮤지컬의 노래를 칭하는 용어)를 부르며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 후로도 수차례에 걸친 대수술을 받고, 꾸준히 그림을 그리던 그녀는 병원비를 부담하느라 집안 세간살이를 전부 파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 ‘그림'을 생업으로 삼아도 될지 고민이 돼 멕시코의 국민화가인 ‘디에고 리베라’를 찾아가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기로 한다. 디에고 리베라와 그녀는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넘버 중 하나인 ‘허밍버드'에서 묘사되듯 계급을 싫어하고 인간의 평등을 믿으며, 원주민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한다는 점이 특히나 그랬다. 디에고의 사상과 그림은 곧 프리다가 꾸던 꿈이기에 그녀에게 그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디에고 역시 프리다의 강인함과 열정에 매료돼 이성으로서 관심 두게 되었다. 당시 디에고는 비록 두 번이나 이혼을 한 남자였고, 프리다보다 21살이나 많았지만 머지않아 프리다와 결혼하게 된다. 그렇게 이제는 행복만 남은 줄 알았던 그녀의 삶은, 한 번의 유산으로 살짝 기울게 되고, 바람기가 다분했던 디에고가 프리다의 여동생을 사랑하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소외와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이라는 세 번째 고통을 겪게 된다. 이처럼 차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모두 겪은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여 만세!’를 외치는 인물이다. 극의 줄거리는 그저 프리다의 생애이지만, 고통에 직면해 때론 현실과 타협하거나 체념하고, 때론 극복하는 그녀의 다양한 모습을 여러 배우의 연기와 노래, 합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뮤지컬을 봐야만 하는 이유이자, 많은 이들이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다. 우리는 ‘프리다'를 보며 자신을 투영해 볼 수도 있고, 그녀의 위대함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고통이 스토킹해도 두려워 말고 한 잔 가득 샴페인을 따르라!’는 가사가 담긴 그녀의 노래 ‘Lavida(인생)’는 관객 모두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뮤지컬이 다 그렇듯, ‘프리다' 삼연이 언제 돌아올지는 부지기수다. 다만, 많은 관객의 사랑으로 초연과 재연 사이의 공백이 짧았던 만큼, 삼연도 머지않아 돌아오지 않을까 짐작만 해볼 뿐이다. 멋진 장면들과 연기, 노래로 가득한 ‘프리다', 뮤지컬을 처음 보는 관객들이더라도 지루해하지 않고 볼 수 있는 115분의 짧은 러닝타임을 지닌 극이다. 이 기사로 결말이나 뮤지컬 자체가 궁금해진 학우들이 있다면, 언젠가 ‘프리다'가 돌아올 때,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러 한 번쯤 보러 가길 강력히 추천한다. 이 자체로 충분해 완벽한 극, 상대적으로 시간과 금액의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최고의 극을 꼽자면 단연 ‘프리다’ 뿐일 것이다. 이채윤 기자
제 726 호 [교수사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으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최근에는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진 세상 탓이다. 책 읽고 토론하는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간다”와 관련한 말을 한 학생에게 설혹 그렇더라도 일본의 경기가 회복되는 것을 보면 희망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자 ‘그 잃어버린 20년 동안’이 바로 자신들이 생산 활동을 해야 하는 시기라고 하였다. 언제나 어느 시대나 장밋빛 인생이 마냥 기다리지는 않지만, 지금의 우리 학생들은 더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직시한 순간이었다. 현실이 얼마나 팍팍한지를 알 수 있는 수치가 있다. 올 9월쯤에 여러 뉴스에서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2023년 하반기 대졸 신규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를 보도하였다. 올해 대졸 신규채용 예상 경쟁률은 평균 81 대 1이라고 하였고, 작년에는 77 대 1이었다고 하였다. 학생들에게 어떤 준비를 해서 어떻게 취업하라고 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이렇게 현실이 팍팍하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현실이 팍팍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팍팍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팍팍한 세상이니 도전도 해 보지 않는 인생을 선택할 것인지, 팍팍한 세상이지만 원하는 목표를 세워서 도전하는 인생을 선택할 것인지를 자신에게 물어보았으면 한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자기 마음속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으면 한다. ‘나는 무엇을 왜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고 자신의 목표를 세워 보기를 권한다. 마음속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잘 관찰하고 살펴보라는 의미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를 찾기 어려우면 학교에서 제공하는 진로 탐색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자신의 목표를 세웠으면 실천하기를 주저하지 말고 그 과정에서 작은 성취를 맛보았으면 한다. 목표는 멀리 내다보며 장기적으로 설정해야 한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위해 나는 지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으면 한다. 그러나 처음 부터 너무 큰 목표를 설정하면 실패의 가능성이 많아 쉽게 포기하게 된다. 눈앞의 목표를 작은 것으로 세우고, 그 하나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해 보았으면 한다. 성공의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달콤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실패를 연속으로 경험하다 보면 잘하는 사람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감이 생기고, 해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도전을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작은 성취라도 이루어 성취감을 맛본 사람은 다음을 생각하고 또 도전할 수 있는 내적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누구나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다. 실패를 겪으면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다음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우선은 실패를 겪으며 생기는 좌절감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음이 힘들면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위로를 받고 또 힘을 내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대학 학생상담센터에서 매년 하는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를 친구나 어머니와 많이 상의한다고 한다. 누구와 상의하고 위로를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누군가와 상의하고 위로받는 그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터놓을 사람이 없다면 학교의 학생상담센터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싶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받으면서 나아가야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가능성을 많이 보았다. 아니 나보다 세상을 더 잘 알고 현명하게 생각할 줄 아는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이 잘해 나갈 것임을 믿게 되었다. 다만 학생들이 만만하지 않은 세상에 휘둘려 너무 많이 휘청대지 않고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너무나 당연한 몇 가지를 제시해 보았다. 더 팍팍해진 삶 속에, 더 치열해진 경쟁 속에 던져진 우리 학생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응원한다는 말과 함께. 계당교양교욱원 전영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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