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7 호 영국의 인종혐오 폭동과 계층격차
영국의 인종혐오 폭동과 계층격차 거의모든나라가다그렇지만, 영국의모습은하나가아니라여럿이다. ‘신사의나라’로알려져있지만, 축구장안팎에서진상을떠는훌리건의나라이기도하다. 신사와훌리건의묘한이중주는영화 <킹스맨>에잘나타나있다. 또한영국근현대사에서도과학기술의진보와더불어침략과수탈의이중주가두드러진다. 영국의한쪽낯은태양아래새로운것은없고옛것을고스란히간직하면손해볼일이없다는보수이지만, 다른쪽낯은젠더및인종의통합이라는가치를가장중시하는혁신이기도하다. 일찍이 1979년에마거릿대처가총리가되어서여왕이군림하고여성이통치하는나라가되었으며, 2022년에는인도계아프리카인부부의아들인라시수낵이총리자리에올라서“유색” 인종이다우닝(Downing)가 10번지의주인이되었다. 또한파키스탄계무슬림사디크아만칸이 2016년이후로수도런던의시장을지내고있다. 완전과는아직거리가없지는않겠지만, 젠더및인종의통합을선도하는나라로보기에모자람이없다. 이런영국에익숙한이들에게는어이가없을사태가지난 8월에터졌다. 영국중서부에서제노포비아폭동이일어나더니영국곳곳으로들불번지듯이퍼져나갔다. 7월 29일에사우스포트라는소도시에서르완다에서영국으로건너온그리스도교인부부의아들인 17세소년이칼로어린이세명을죽인비극적범죄가일어났는데, 무슬림난민신청자가범인이라는헛소문을극우세력이퍼뜨리자흥분한백인들이인종차별구호를외치며모스크와난민수용시설을공격하기시작했고, 이폭동은잉글랜드는물론이고웨일스와북아일랜드로까지퍼져나갔다. 폭동의기세가워낙거세서저지하는경찰이밀리는상황마저나타났다. 폭도는지나가는차를검문하면서운전자가백인이면보내주고백인이아니면공격하는행태까지보였다. 상점약탈은덤이었다. 영국이지향해온인종통합의가치를밑동부터뒤흔드는부끄러운사태가아닐수없다. 폭동교사자들이퍼뜨리는정보가가짜이며헛것이라는사실을일일이밝힐필요는따로없다. 믿고싶은것만가려서믿는그들에게는사실이중요하지않다. 영국에서왜이런일이벌어졌을까? 대중의무지만을탓하는것은지식인의오만일수있다. 산에는낙엽이늘쌓여있지만, 낙엽이촉촉하면불이붙을리없다. 불은낙엽이바싹말라있을때에만일어난다. 지난 8월영국의인종혐오폭동은유달리하층민에게가혹하게작용하는경제파탄과맞물려있다. 경제운영에무능한데다가계급및계층간격차해소에애쓰지않은영국보수당정권아래서힘겹게사는영국의중하층백인이울분을푸는대상을엉뚱하게난민과무슬림에게서찾았던것이다. 인종혐오는계급문제와연동한다. 영국사회가맞닥뜨린이문제를소수자의배제로해결하려든다면시쳇말로번지수를잘못짚은셈이다. 근본적으로는계급격차가줄어들어야인종혐오를잠재울수있다. 시간이오래걸리고품이많이들겠지만, 그길이올바른길이고결국은더지름길이기도하다. 류한수(역사콘텐츠전공)
제 737 호 다시 돌아온 인사이드 아웃2
인사이드 아웃 1, 개봉 당시 평이 상당히 좋았던 픽사 애니메이션 시리즈다. 여러 디테일이나 세심한 장치들이 어른들에게도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해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시즌 2, 후속작이 나왔다. 인사이드 아웃은 어쩌면 한 번쯤 다들 상상해 보았을,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라일리라는 소녀의 머릿속 감정들이 의인화되고, 주변의 변화와 성장 과정 속에서 이야기들이 진행된다. 시즌 1에서는 기쁨이 인생의 주를 담당하던 라일리가 주변의 변화 속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고, 모든 감정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여정을 그리고 있다. 기쁨이가 슬픔이를 골칫덩이로 취급하며 감정본부에서 다투다 저 깊은 내면의 세계로 떠나게 되는데, 사실 이게 다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바라보면 라일리 스스로가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주된 감정(기쁨)이 그녀를 통제하려고 하지만 우울이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고, 혼란 속에서 결국 갈피를 잡지 못해 감정을 저 아래 묻어둔 것 같기도 하다. 내면세계 속에서 본부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 제대로 감정을 다시 통제하기 위한 모험은 감정들과 라일리를 성장시켰다. 라일리는 아직 감정이 역동적이고, 통제가 어려운 어린아이지만 여느 누구나 그랬듯이, 스스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감정과 생각, 성찰에서 오는 깨달음(이성)은 다른 것이기에. 때로는 당장의 감정에 못 이겨 무신경하게 기억을 넘기고, 지나치지만 결국 물밀듯이 쏟아진 기억들은 라일리를 덮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험과 기억들은 그녀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신념으로 자라날 것이다. 2에서 그랬듯이. 잘해보고 싶었던, 어느 누구나 공감할 ▲ 인사이드 아웃2 포스터 (사진 : https://m.blog.naver.com/stella9497/223501668420) 2에서는 라일리가 성장하면서 사춘기에 접어드는 과정을 그렸다. 이번에도 그녀는 새로운 환경에 마주하게 되면서 혼란에 접어들고, 새로운 감정들이 튀어나온다. 특히 감정본부와 라일리를 지배한 불안이. 극 중 불안이는 ‘너는 라일리의 기쁨을 담당하지만, 나는 라일리를 미래의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데 불안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불안이라는 건 감각을 극대화해서 사람이 자극에 예민해지도록 만든다. 이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시켜 준다. 언젠가 수강한 심리학 강의에서 이런 불안, 예민함이 높은 사람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유래된 형질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불안 관리는 결국 스트레스와 직결되어 있는 만큼 스스로 불안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아직 많은 이들이 이 과정을 배우는 중에 있다. 이후 일이 해결된 후일담에서는 불안이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연출도 이젠 라일리가 어느 정도 불안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성장을 가늠할 수 있었던 부분이기에 기억에 남는다. 한편, 새로운 감정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감정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불안'이라는 강박적인 요소가 치고 들어와 원래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뚝딱거리는 것이다. 닥쳐올 외부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불안으로 라일리는 미래를 위해 감정들을 억압하게 된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나름대로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던 라일리의 좁은 신념이자, 약간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신념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동시에 본인 스스로의 강박과 좁은 시각으로 세상을 대하는, 어린 부분이 여기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 인간은 다면적이고, 정의할 수 없지만 추구하는 무언가(신념)로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과정의 연속이다. 모두가 성장하면서 경험하는, 인간이 단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언젠가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었던가 잠시 되짚어보게 된다. 라일리 스스로가 감정에 못 이겨 저 멀리 어딘가에 묻어둔 기억이 폭포수처럼 다시 쏟아지고, 라일리는 일종의 '성찰'을 한다. 신념은 꺾일 수도 있고, 새로 자라날 수도 있는 것이다. 라일리가 어떤 사람인지 감정들이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불안에 잠 못 드는 모든 라일리에게 사실 감정들의 이야기도 중간중간 눈에 들어왔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라일리가 페널티박스에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다는 혼란스러운 싸늘함. 점점 차오르는 불안은 통제하지 못하고 점차 심장 소리가 더 커지도록 연출된다. 사람이 극도로 불안하고 예민한, 일종의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때를 정말 잘 표현한 것 같다. 불안과 부담, 자책과 자기혐오 등에 휩쓸린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누구나 진심으로 ‘불안’ 해본 사람이라면 당시 머릿속에서 ‘불안’이 통제를 잃은 모습의 연출에 많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모든 감정들이 스스로 라일리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라일리의 다면적인 신념 자체를 감싸안아 주는 따스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렇게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생각해 주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큰 힘이 될 것 같다. 실제로 감정들은 라일리를 ‘딸’이라고도 부르며, 매번 '라일리를 위해서'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각자의 선택과 그 결과와는 별개로 라일리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점이 마음을 따스하게 만든다. 인사이드 아웃2는 성장한 라일리의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아주 흥미로운 영화였다. 매번 볼수록 세심한 디테일이나 연출들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유도해 어린이 애니메이션 영화이지만 결코 절대적인 깊이는 얕지 않다. 불안, 감정들의 혼란 속에서 고민하던 모두의 유년기와 지금의 라일리들에게 위로를 던지고 있는 인사이드 아웃2. 고민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내일을 살아갈 모든 라일리들을 응원한다. 곽민진 기자
제 736 호 [순간포착] 낭만, 젊음, 사랑
낭만, 젊음, 사랑 개강과 함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여름의 열기가 가라앉고, 캠퍼스에는 가을의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대학 생활은 매 순간이 특별하다.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해줄 세 가지 키워드, 낭만, 젊음, 사랑을 마음에 품고 2학기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낭만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다. 우리는 종종 '낭만'이라는 단어를 특별한 순간이나 로맨틱한 상황에만 연관 짓곤 한다. 하지만 낭만은 그 이상이다. 낭만이란 일상의 소소한 순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특별함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커피 한 잔, 도서관에서의 늦은 밤, 캠퍼스의 가을 단풍길을 걸으며 느끼는 여유 속에도 낭만이 깃들어 있다. 대학 생활에 나만의 낭만을 더해본다면 그 순간들이 쌓여 훗날 소중한 추억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젊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다. 이 시기의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과 도전정신을 상징한다. 실수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다. 그 과정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다. 대학생으로서의 젊음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는 시간이다.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나만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이 젊음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이 젊음을 마음껏 누린다면 나중에 뒤돌아보았을 때, 후회 없는 대학 시절로 기억될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다. 대학 시절의 사랑은 단순히 연애에 그치지 않는다. 친구를 향한 우정, 가족을 향한 감사,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 모두가 사랑의 한 형태이다.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하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과정이 더욱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받는 법을 배워가는 이 시기를 소중히 여기길 바란다. 이 사진은 하계방학에 가족여행 중 케이블카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잠시 마지막 학기만 남은 대학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 2학기는 낭만을 찾고, 젊음을 만끽하며, 사랑을 배우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학우들도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마음에 품고, 대학 생활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개강의 설렘과 함께 시작하는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가장 특별한 시기의 청춘을 만들어가 보자. 정소영 기자
제 736 호 [교수칼럼] 마케팅 포지셔닝과 나의 미래 설계하기
마케팅 포지셔닝과 나의 미래 설계하기 꽤 오랜 시간 회사에 있다가 학교를 다시 오게 되면서 이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지금 제 나이에 너무 늦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내가 다니던 회사에 신입직원은 남녀를 떠나 거의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었고, 28살만 되도 모두가 어리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고 조금은 슬픈 생각이 들었다. 분야별로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다니던 공공기관은 실제로 인턴, 졸업 하기 전 NCS 까지 여러 과정을 거쳐 취업하기 때문에 20대 후반이 되어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신입직원들 중에는 학교 다닐 때 창업도 해보고 체험형 인턴을 비롯해 다양한 일을 해보면서 공공기관과 자신이 잘 맞는다 라는 것을 안 뒤 선택한 경우도 많아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와보니 아직 20대 초반인 학생들이 스스로를 늦었다고 생각하고 나의 미래를 빨리 결정해야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하면 어떤 형태로든 사회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졸업 전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고민은 어떻게 보면 매우 당연하다. 다만, 앞으로 긴 시간을 살아가는데 있어 우리 학생들이 충분히 고민하고 많이 경험한 뒤에 사회생활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고민의 과정에서 “이것 만큼은 내가 1등”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갖고 사회에 진출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어떻게 1등을 해야 할까? 마케팅의 포지셔닝에서는 그 1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포지셔닝은 기업이 목표로 하는 소비자의 마음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기업이 행동하는 일련의 행동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이것만은 우리가 1등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소비자에게 주는 것이다. 가격을 저렴하게, 디자인을 독특하게, 재밌게 등등.. 소비자의 마음 속에 자기만의 1등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즉 남들과는 다른 내가 잘하는 것을 찾아낸다면 1등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많다는 것이다. 우리 학생들도 미래를 설계할 때 늦었으니 빨리 선택해야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서 내가 가장 즐겁게 해본 일이 무엇인지, 남들은 어려워했지만 나에겐 쉬웠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내가 1등할 수 있는 분야에 진출해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닌 즐겁게 삶을 살기 위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으면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앞서 공공기관을 목표로 입사한 신입직원들 중 3-40%가 내가 생각한 일과 다르다는 이유로 3개월도 안되어 퇴사하기도 한다. 힘들게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고, 몇 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도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해보고, 인턴이나 일경험을 해보고 공공기관을 선택한 직원들은 자신이 공공기관이 지닌 특성과 잘 맞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만족하면서 다니기도 한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찾는 것은 정말 어렵고 또 이제까지 생각해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런데 나의 마음 속에서 내가 1등할 수 있는 것을 찾는 시간을 갖는 것은 꼭 필요한 시간이다. 그런 꼭 필요한 시간을 늦었다라는 생각으로 외면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것을 했을 때 가장 칭찬을 많이 들었는지, 무엇보다 내가 가장 즐거웠는지를 생각하고 나 자신을 포지셔닝하고 나의 미래를 설계를 한다면 오늘은 다소 힘들지 모르지만 미래에는 더 즐겁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 736 호 [교수사설] 디지털 인공지능 시대와 인문학적 자질
디지털 인공지능 시대와 인문학적 자질 오늘날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은 보편적인 사회적 환경이다. 이미 인터넷과 개인용 컴퓨터가 상용화된 상황에서, 유튜브가 2005년에,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인 애플의 아이폰이 2007년에 등장하여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었다. 절대다수의 상명대 학생들에게 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은 어릴 적부터 친숙한 디지털 기기들일 것이고, 유튜브는 다양한 지식과 문화콘텐츠의 공급원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네이버와 다음으로 대표되는 자국어 포털 사이트, 그리고 카카오톡이라는 국민적 소셜미디어가 일찍이 자리 잡은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과 같은 IT 선진국에서, 디지털 기술은 사회적 환경을 넘어 거의 ‘제2의 자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수년 사이 본격적으로 전 지구적인 사회적 의제가 된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사물 인터넷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전자제품을 통하여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으며, 쳇 지피티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인식과 사고방식 자체를 전반적으로 재규정할 수도 있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인공지능 기술의 고도화로 인하여, 어쩌면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사회활동을 보조하는 도구를 넘어, 인간을 ‘대신하여’ 사고하고 활동하는 상황까지 갈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가장 손쉽게 대치할 수 있는 직업군 등에 대한 언론보도나 전문가의 의견이 일상적으로 큰 사회적 관심을 유발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급속한 사회적 변화는, 그 자체로 불가역적인 현실일 것이다. 따라서 우선 상명대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이나 개인적 관심사를 관련된 디지털 기술과 연계하여 사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학교 차원에서도 이러한 기술적 변화와 연동된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개발하여 제시하고 있으니, 학생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한 편, 아직은 현실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역인 새로운 인공지능 시대에 대해 많은 사람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누구보다도 딥러닝과 인공지능의 창시자와 개발자들 및 관련 업계의 중요 인물들이 표명한 것이기도 하다. 딥러닝과 인공지능 기술의 대부라고 불리는 제프리 힌턴이 자신이 발전시킨 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작년 5월에 구글을 퇴사하였다. 이보다 앞선 2023년 3월 22일, 미국의 비영리단체 ‘생명의 미래 연구소’는 ‘거대 인공지능 실험 일시 중지 공개서한’을 발표하였다. AI 연구소들이 더욱 강력한 디지털 두뇌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경쟁에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갇혀있고, 아무도–심지어 이를 발명한 사람들조차–이를 이해하거나, 예측하거나, 안정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최근 몇 달 동안 목도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수준(=충분한 재원을 동원한 실질적인 예방적 관리 수준)의 계획과 관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우리는 이 기계들이 허위선전과 거짓 정보로 우리의 정보 채널을 뒤덮어 버리도록 허용할 것인가? 우리는 모든 일, 심지어 우리에게 성취감을 주는 일까지도 자동화하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종국에는 우리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더 영리해서,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고 우리를 대체할 수도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해야 하는가? 우리는 인류 문명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결정을 민주적으로 선출되지 않은 기술 업계의 리더들에게 위임해서는 안 된다. 위의 서한에 일차로 서명한 1279명의 명단에는 인공지능 연구의 최고 권위자들뿐만 아니라 인문학계의 관련 학자들, 오픈 에이아이(Open AI)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한 일론 머스크,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등의 기업인들도 있다. 그런데 이 서한은 거대 인공지능의 발전이 그 자체로는 필연적이며, 신중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큰 이익과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사실상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거대 인공지능과 관련한 논쟁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복잡한 주제라서, 이 칼럼을 쓰는 나 자신도 사실은 지극히 피상적인 지식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프랑스 문화예술 전공자로서, 수학적이고 공학적인 이해는 사실상 전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조하고 싶은 바는, 인공지능의 발전이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엄청난 가능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문제를 사고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일은 전공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가령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앞선 총체적 비전과 비판적 상상력을 제시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사이버 펑크 SF 장르의 토대가 된 소설 『뉴로맨서』를 1984년에 출간한 작가 윌리엄 깁슨이 있다. 깁슨은 이 소설에서 사이버스페이스, 매트릭스, 네트워크 형 거대 인공지능 등의 개념과 상상력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1984년은 이제 막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최초의 매킨토시 모델을 출시한 해였다. 따라서 깁슨이 『뉴로맨서』를 쓰면서 아직 어떤 개인용 컴퓨터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결론적으로 상명대 학생들이 한 인간이자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으로서,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이 이미 야기하고 있고 앞으로도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공지능을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인공지능의 발전과 더불어 큰 사회경제적 의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이 사회의 전 부문에 관련된 기술인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문제의 해결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활동, 디지털 기술을 또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창조적 시도들이, 경제적 차원과 연동되어 다양한 직업 또한 만들어 낼 것이다. 인공지능을 직접적으로 프로그래밍하는 일을 하게 될 이공계 학생들도, 자신이 하는 일의 총체적인 인간적 의미를 더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할 때,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하고 필요한 인공지능의 활용 방안을 제시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디지털 기술 혹은 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더해, 인문학적 사고 능력과 상상력을 고루 갖춘 뛰어난 상명의 인재들이 전공을 막론하고 배출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제 736 호 [기자석] 나의 아픔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것
올해 들어 나는 정말 ‘고통받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들이 유독 많았고, 성격도 조금 변했다. 여러 일로 힘들었던 와중에, 우연히 듣게 된 ‘호모 엠파티쿠스(고통받는 인간)’이라는 교양수업을 통해 나에게서 힘듦의 원인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호모 엠파티쿠스(고통 받는 인간) 강의 수업 자료 중 박완서「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자식을 잃은 나의 고통에서 다른 사람은 위안을 얻는다. 강의 중 교수님은 이 부분을 설명하시며 남이 자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과의 비교를 통해 위안을 얻는 것의 윤리적 문제에 생각해 보자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 내용을 다시 생각해보며 나보다 더한 남의 고통과 비교해 위안을 얻는 것과는 반대로, 남의 고통에서 더한 아픔을 느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내 판단의 기준은 나보다 힘들, 나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힘들더라도 나보다 더 바쁜 사람도,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있으니까 나는 더 노력하고 더 힘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다들 힘든데 나만 힘들다고 말하면 내가 너무 나약한 사람으로 비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내가 아닌 남에게 있어서, 더 힘든 것 같다. 겪고 있는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아픈 나를, 내가 더 옥죄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직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내가 나와 누군가의 아픔을 또 다른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힘들 때 내 아픔을 누군가의 아픔과 비교하며 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아픔을 제일 잘 아는 건 나니까, 나의 아픔에 공감하고 싶다. 그저 힘듦을 이겨내는 방법을 잘 찾아낼 수 있었으면. 누군가를 위로할 때도 비교보다는 상황과 감정에 대한 공감이 앞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니까, 힘든 상황에 허덕이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픈 스스로를 더 아프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자체로 소중한 우리들을 아껴주자. 이은탁 기자
제 735 호 [만평] 늘어지는 하루
제 735 호 [책으로 세상 읽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아마추어 수영 대회에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표지 (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3239082) 주로 에세이 책에는 이렇게 잘 사는 나, 이렇게 멋진 나, 이렇게 똑똑한 나 등 자신을 뽐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에세이 책 자체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는 나 자신에 취해있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달리는 나 자신에 취해있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달리는 이야기에 대한 책이지 건강법에 대한 책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 “자, 모두 함께 매일 달리기를 해서 건강해집시다”와 같은 주장을 떠벌리고 싶은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라는 인간에게 있어 계속 달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하고 생각하거나 자문자답하고 있을 뿐이다. - 서론 중 그러나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책이었다. 달리고 있는 자신을 뽐내며 독자를 붙잡고 한 번 달려보는 건 어떠냐는 식의 내용이 아니라, 달리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담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업 작가로 일하게 되면서 체력을 기르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가 어느새 마라토너에 도전하고, 점차 나이 들어가면서 젊었을 때의 마라톤 기록을 깨기 어려워지자,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건강을 위해 시작했다지만 시간이 흐르며 달리기 자체에 몰입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며, 나도 저렇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구름.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져 간다. 그렇지만 하늘은 어디까지나 하늘 그대로 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쳐 지나서 사라져 갈 뿐이다. 그리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본론 중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는 재작년에 매일 1시간씩 걸었던 게 생각났다. 화가 나고 슬플 때마다 걸으면서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랬던 거 같아서 공감됐다. 국가대표와 같은 프로 운동선수가 되지 않더라도 대회를 목표로 운동을 즐길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도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주 종목을 마라톤에서 철인 3종으로 바꾸게 되는 대목에서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수영 연습을 해나가는 무라카미 모습을 보며 대단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생각 중, 책을 덮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마추어 수영선수 대회를 나가고 싶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나에게 달리기와 같은 존재인 수영이 생각났고, 다시 수영을 시작해서 최종적으로는 아마추어 수영 대회에 나가고 싶어졌다. 운동을 배워본 적은 있어도 대회를 준비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고, 중학교 2학년 때 태권도를 그만둔 이후로는 꾸준히 운동을 해본 적도 없고 무엇보다 어릴 때 수영을 배우고 다 까먹어서, 지금은 한 팔 접영까지밖에 못하는 상태지만, 그럼에도 무작정 아마추어 수영 대회를 목표로 수영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담긴 어떠한 에너지가 나에게 영향을 끼친 것만 같았다. 책을 읽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내가 정말로 아마추어 수영 대회에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영을 다시 시작하고 싶고, 다시 시작할 것이고, 그 목표는 아마추어 수영 대회란 것만은 확실하다. 그 정도면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지연 수습기자
제 735 호 [순간포착] 유채꽃과 함께한 봄날의 마지막
유채꽃과 함께한 봄날의 마지막 지난 5월에 반포한강공원 서래섬에서 유채꽃 축제가 진행되었다. 다들 길을 걸으며 봄에 화사하게 핀 유채꽃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유채꽃은 밝은 노란색을 띠는 꽃으로, 따뜻한 느낌을 준다. 유채꽃의 꽃말은 활력과 기쁨, 낙관과 긍정을 상징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상명대 학우들도 다가온 여름을 맞이하며 행복한 일들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정소영 편집장
제 735 호 [교수칼럼] 자화상을 '쓰는' 자기성찰의 시간
자화상을 ‘쓰는’ 자기성찰의 시간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볼 때가 있다. 가장 친숙하고도 어딘지 낯선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자아성찰(自我省察)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 반성하고 살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거울 속의 모습이 사실 뒤집힌 상(象)이듯, 자신을 온전히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루에 세 번씩 스스로를 살피고 돌아보라는 ‘삼성오신(三省吾身)’의 고사가 있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자신을 대면하는 일은 힘들고 두렵기 마련이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지금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서 있는지, 나의 진실한 마음과 소망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한 유효한 방식이 ‘자화상 시 쓰기’다. 17~18세기 서구에서 근대의 도래와 함께 본격적 자화상이 대두되었는데, 자화상은 근대적 주체를 찾고 표현하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도구였다. 본래 회화의 양식이나, 18세기 이후 문자를 활용한 하나의 글쓰기 형태로서 자기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문학에서도 식민지기에 많은 자화상 시편들이 나타난다. 거울 등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근대인의 ‘자화상적 응시’가 나타나 있는 시들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이들에게 근대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1930년대 이후 나타난 일련의 자화상 시편들 중 서정주, 윤동주, 노천명, 이상의 <자화상> 시편을 읽어보면 새로운 근대적 주체로서 세계를 해석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특히 윤동주의 자화상 시편이 주목되는데, 그 시편들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과 자기수양, 좀 더 고양된 자신을 지향하는 승화와 초월의 상승 의지가 우물을 들여다보거나 하늘과 별을 우러러보고, 거울을 닦는 등의 자기 성찰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물론 화가처럼 스스로를 그려보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듯 자화상 시를 써보라는 제안을 하고 싶다.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을 찾고, 스스로에 대해 설명하고, 묘사하며 다른 것에 비유하는 문장을 여러 개 만들어 이것을 재료로 해서 시를 써보자. 그리고 자기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나 주변의 인물, 사물들로까지 서서히 시선을 넓혀보는 것이다. 시는 잘 짜인 기승전결의 내러티브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흩어진 기억과 감정, 스스로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의 속마음을 담아내기 좋다. 정순진(2014)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거나 존재 의의를 발견하고자 할 때 시를 쓰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은유는 인간과 세계 간의 상호작용, 관계를 이해하고 감정이입 하는 데서 생겨나므로 은유를 사용하면 숨겨진 가치와 의미를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자화상 시 쓰기’를 통해 자기 표현력도 기르고 세상에 대한 통찰력도 높일 수 있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것도 괜찮다. 문학적으로 완성된, 잘 쓴 시일 필요도 없다. 사실 우리나라 입시 현실에서 대학생들은 경쟁적 풍토와 과열된 입시 위주 교육으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고 이해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채 대학에 오게 되곤 한다. 그러니 대학시절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생각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삶의 의미와 나아갈 방향을 찾는 일은 자기 외에 누구도 할 수 없다.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시점이다. 곧 방학이 시작될 텐데, 이번 방학에는 오랜만에 고요히 앉아 자기 자신과 나누는 나직한 대화처럼, 자화상 시 한 편 써보는 것은 어떨까. 잊고 있었거나, 자기도 모르던 자신의 부서진 조각이 발견되어, 스스로를 새롭게 다시 만들어갈 작은 시작이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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